イ・スヨン光源産業会長が676億ウォン相当の不動産を拠出し、KAIST(旧:韓国科学技術院)に「イ・スヨン科学教育財団」を設立する。7月23日、寄付約定式を行った。今回設立される財団の収益金は、研究者に短期実績より研究に没頭できるようにする「KAISTシンギュラリティー教授」プログラムの支援に使われる。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카이스트에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한다. 23일 기부 약정식을 열었다. 이번에 설립되는 재단 수익금은 연구자들에게 단기 실적보다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카이스트 싱귤래러티 교수’ 프로그램 지원에 쓰인다.
これに先立ち、2012年と16年にそれぞれ約80億ウォン、約10億ウォン相当の不動産を遺贈した李会長は、3度目の寄付を通じて、KAIST史上最高寄付額の766億ウォンを記録した。KAIST発展財団の理事長も務めている彼女は、同日、韓国初のノーベル賞受賞者がKAISTから出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願いを伝えた。
앞서 2012년과 2016년 각각 약 80억원, 약 1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유증한 이 회장은 세 번째 기부를 통해 카이스트 사상 최고 기부액인 766억원을 기록했다.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는 그는 이날 한국 최초 노벨상 수상자가 카이스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염원을 전했다.
また「自分が死ぬ前に稼いだお金を意味深く使いたかったが、あげる対象がなかった」として「韓国が豊かに暮らす道は科学技術の発展しかないと思い、寄付を決心した」と明らかにした。彼女はこの日「科学は知らないが、科学の力がどれほど大きいかは知っている」として「韓国の未来を牽引する科学技術人材を育ててほしい」と述べた。
또 ”내가 죽기 전에 벌어놓은 돈을 뜻깊게 쓰고 싶었는데 줄 대상이 없었다”며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길은 과학기술 발전밖에 없다고 생각해 기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과학은 모르지만, 과학의 힘이 얼마나 큰 줄은 안다”며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과학 기술 인재를 키워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京畿女子高とソウル大学法学部を卒業した李会長は、1963年ソウル新聞に入社し、1980年、全斗煥政権の言論統廃合で強制解雇されるまで、韓国経済新聞やソウル経済新聞などのメディアに在職した。記者として在職中に始めた週末農場を契機に1971年、畜産業をスタートし、退職後、本格的に事業を展開した。 1988年には不動産専門企業の光源産業を設立した。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이 회장은 1963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1980년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 해직될 때까지 한국경제신문, 서울경제신문 등의 언론사에 재직했다. 기자로 재직 시절 시작한 주말농장을 계기로 1971년 축산업을 시작, 퇴직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1988년에는 부동산 전문기업 광원산업을 설립했다.
中央日報は、彼が組職暴力団から生命の脅威を受けたり、腎臓がんの闘病をして死の峠を越え、苦労してお金を貯めたと伝えた。 80年以上独身だった李会長は、2年前、ソウル大学法学部の同期同窓で、初恋の人だった現在の夫、キム・チャンホン弁護士と結婚したという。
중앙일보는 그가 조직폭력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신장암 투병을 하며 죽음의 고비도 넘기며 힘들게 돈을 모았다고 전했다. 80년 넘게 독신이던 이 회장은 2년 전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이며 첫사랑이었던 현재의 남편 김창홍 변호사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KAISTは大田にある、韓国の理系大学院大学で、。サムスン電子の修士・博士号を持つ従業員の25%がここ出身です。シンギュラリティー教授は、これに選ばれると任用後10年間、論文評価を受けずに研究に没頭できる、KAISTが韓国で初めて導入した制度。
もともと新聞記者だった李会長は、記者業の傍ら週末は京畿道・安養で畜産をしますが、規模が大きくなり、昼は記者、夜は牧場の生活を続けていたといいます。記者解職後、牧場に専念するようになり、陸軍への慰問品や学校への牛乳無料提供など、需給が不安定な畜産業に降りかかる数々の危機を乗り切ってきました。そこから事業を拡大して砂利採取業で富を築き、不動産業に進出したという、時代の先端を切り開いてきた人です。
コメント